1972년 6월 28일 아침, 꽝찌 고성은 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81일 밤낮의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1972년 9월 16일까지 이어진 이 전투는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공방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적군은 B-52 융단폭격, 함포, 포병 등 파괴적인 화력으로 땅 1m²까지 초토화한 후 보병과 장갑차를 서서히 진격시키는 '잠식' 전술을 펼쳤습니다. 81일 동안 미군과 사이공군은 고성과 시사 일대에 약 328,000톤의 폭탄과 포탄을 쏟아부었는데, 이는 원자폭탄 약 7발에 달하는 파괴력에 해당합니다. 7월 25일 같은 날에는 고성에 5,000발 이상의 대포탄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병사 한 명당 평균 약 100발의 폭탄과 200발의 포탄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셈입니다.
그 폭격의 비 속에서도 병사들은 진지마다 달라붙어 성벽 한 조각, 집 한 채를 지켜냈습니다. 해방군은 방어와 반격을 거듭하며 탁한강 북쪽 강변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하루에 5~7회, 많게는 13회에 이르는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고성은 1m의 땅조차 불굴의 용기와 숭고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던 현장이었습니다.
연일 쏟아진 맹폭 끝에 꽝찌 시사는 거의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고성 역시 전쟁의 상흔이 얼룩진 성벽 파편과 성문 일부만이 남았습니다. 81일 밤낮의 혈투 끝에 병력이 극도로 줄어든 1972년 9월 16일, 아군 부대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주도적으로 탁한강 북안으로 철수했습니다. 이는 적을 묶어두고 막대한 타격을 입힌다는 전략적 임무를 완수한 후 단행된 전술적 철수였습니다. 아군 통계에 따르면 전 전선에서 약 26,000명의 적군이 섬멸되었고, 200대 이상의 항공기가 격추되었으며, 수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가 파괴되었습니다. 아군 측 역시 수천 명의 장병이 희생되는 막대한 손실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전투가 적의 초기 예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어 적의 정예 전력을 크게 소모시켰고, 전장과 협상 테이블 모두에서 결정적인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1972년 꽝찌에서의 전황은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 협정 체결에 이르는 여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진: 꽃다운 스무 살 청춘의 군인들